[독자기고]김인혜의 어린왕자, 연성대학교 독후감 공모전 금상 수상작

선데이타임즈 승인 2019.11.10 12:25 | 최종 수정 2019.11.10 12:26 의견 0

[독자기고=연성대학교 김인혜]내가 처음 어린왕자를 읽었던 건 중학교 1학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즈음 나는 겉멋에 들어 책 읽는 지성인 흉내를 내며 다녔던 것 같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부터 토마스 하디의 ‘테스’까지. 조금 이름이 있다 싶으면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읽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뽐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춘기 소녀였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책 읽는 문학소녀에 심취해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이었다. 나는 시험에서 해방된 것을 즐기기 위해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동안 읽지 못했던 여러 책들을 빌리러 갔었다. 도서관을 돌며 마지막 코너를 돌았을 때 나는 ‘어린 왕자’를 발견했다.

어린 왕자는 그야말로 ‘지성인이라면 다 읽는 책’이라 동경하며 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폈다. 그러나 이럴 수가. 지루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담긴 책은 아니었음은 확실하였다.
 
내가 어린 왕자를 다시 읽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그 때의 나는 겉멋으로 책을 읽는 아이는 아니었다. 도서관을 수시로 드나들며 새로운 책을 읽는 것에 한참 푹 빠진, 정말 문학을 사랑하는 여고생이 되어있었다. 그 날도 나는 어김없이 도서관을 쭉 돌며 새로 빌릴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가장 끝 칸에 자리를 잡고 있는 어린 왕자가 보였다. 그 즈음 나는 정말 좋아하는 가수가 있었는데, 그 가수가 한 프로그램에 나와 어린왕자를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꼽으며 그 이유는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진다.’ 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그 가수를 동경하는 마음으로 어린 왕자를 가볍게 집어 들어 일주일간 대출을 했고 그 날 밤, 어린 왕자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어린 왕자를 보며 어린 날의 나를 마주하게 되었고, 이제는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워버린 어른도 아이도 아닌 나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몹시도 슬픈 일이었다. 어릴 적 나는 내가 행복한 사람이라 믿었고, 행복한 어른으로 자랄 것이라 믿었지만 당시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하지 않아. 불행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으니. 나는 어느 순간부터 어린 인혜를 부끄러워하며 살았으니. 나는 어린 인혜가 사라지길 바라며 살았다. 그래서 나는 창피한 어린 인혜와는 다른 인혜로 나를 바꿔갔고, 나는 이제 창피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왕자만 아니었다면 나는 어린 인혜를 다시 만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결국 어린 날의 인혜를 다시 마주하게 하였다.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던 어린 그 아이를. 하지만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던 어린 인혜가 몹시도 그리워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행복한 어른으로 자라겠다는 약속, 지키지 못해 미안해. 내 안의 내가 속삭였다. 어린 인혜는 그제야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늘 내 안에서 쥐 죽은 듯 몸을 숨기고 살아가던 어린 아이가. 그 순간 눈물이 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인혜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 동안 살면서 나를 지켜주지 못한 상황들을 원망하며 살아왔는데. 나는 어린 인혜를 지켜줬어야 했다. 나는 배반자가 되었다.
 
나는 많이 흔들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들어가고 입시를 준비하고.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는 수없이 흔들렸다. 나중에는 그런 흔들림이 즐겁기도 하였다. 그래, 나는 늘 그랬지.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안정적이었던 적이 있었어? 나는 늘 그랬어. 상황이 뒤바뀌었다. 이제 나는 지금의 내가 몹시도 싫고 부끄럽고 창피하였다. 어린 날의 나를 미워하던 나 스스로가 가장 못나고 한심하고 못생긴 사람이었다. 나는 사랑 받지 못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 그렇게 타이르면 내 어린 인혜를 위한 앙갚음을 하는 것 같은 후련함도 들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따뜻한 평화를 바랐지만 나에게 허락 된 것은 매서운 추위 속에서의 안정이었다. 나는 추위 속에서 안정을 느끼길 바랐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내 친구들은 열심히 자신이 갈 대학과 학과를 알아보며 면접이나 수능 준비에 한창이었다. 나도 그 당시에는 대학원서 접수하랴 면접 준비하랴 바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뜨겁게 타오르기도, 차갑게 식기도 하였다. 어른이 된다는 것만이 그 당시의 나를 견딜 수 있게 하였다. 어른이 되면 괜찮을 거야. 어른이 되면. 행복해질 거야. 그것만 반복하였다. 날이 차가워질수록 내 마음은 더 심란하였다. 그 때 나는 어린 왕자를 다시 읽고 싶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다시 도서관으로 내려가 어린 왕자를 빌렸고 그 날 학교에서 나는 수업을 듣지 않고 계속 어린 왕자만 읽었다.
 
나는 몇날 며칠을 어린 왕자만 읽었다. 읽은 부분 다시 읽고, 몇 페이지 지나서 또 그 페이지를 읽으러 다시 오고. 다 읽고 또 읽고. 책 안엔 현실엔 없는 답이 있는 양 읽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영심 많은 어린 왕자의 장미와 내가 다를 게 없네. 자신과 똑같은 꽃이 오천송이나 피어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기침을 마구 해대며 창피한 꼴을 면하려고 죽는 시늉을 하는 장미가, 사실은 나였네.’ 그 순간부터 나는 몹시도 창피하였고, 그 창피한 꼴을 면하려고 죽는 시늉을 하였다. 그게 무엇이었냐 묻는다면 어른이 되었다며 열심히 술을 마시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는 화장을 하는 것이었다. 사고 싶었던 물건들을 돈 아끼지 않고 사대기도 하였다. 그러면 나는 창피한 꼴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공허함에 사로잡혀 틈만 나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극에 달했던 것은 작년 7월. 그러니까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쳤을 때다. 나는 어린 날의 내가 몹시도 보고 싶어졌다. 어린 날의 아빠도, 어린 날의 엄마도. 어린 날의 할아버지 할머니, 지금보다 어린 고모도. 내 어린 사촌 동생들까지. 내가 사랑하였던 그들이 보고 싶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린 왕자의 장미꽃이 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잘 있어!”라고 인사를 고하며 자신을 떠나가던 어린 왕자에게 “내가 어리석었어. 용서해줘. 부디 행복하기 바라.”라 인사를 건네던 장미가. 그제야 나는 왜 내가 허영심 가득한 존재가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랑이 부족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타인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이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 채울 수 없는 부분을 타인의 애정으로 채울 수 있다 믿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자신의 허영으로는 어린 왕자를 옆에 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안 장미는 그래서 어린 왕자에게 둥근 덮개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하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 순간 다시 나의 어린 인혜를 만날 수가 있게 되었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오롯이 서로를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서로를 원망하거나 구속할 필요는 없었다. 서로는 서로의 어린왕자와 장미였다. 서로에게 길들여진 세상 단 하나뿐인 존재. 그것을 긴 시간들을 돌아 알게 되었다. 어린 왕자의 여정의 끝에 그가 자신의 장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 후로도 나는 이따금씩 지루함과 공허함을 느낀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전에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사랑이라는 것은 다채로운 불순물들을 포함한다고.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니 역시 마찬가지로 다채로운 불순물들을 끌어안겠지.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이 내가 전에 말했던 추위 속에서의 안정인 것일까? 요즘은 삶이라는 것은 따뜻한 평화와 추위 속에서의 안정을 번갈아가며 마주하게 되는 여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차피 이렇게 지루하고 공허한 삶이라면 매 순간 그 순간을 즐기려 노력하며 살면 되는 것이 아닐까? 다만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제 나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타인에게는 다정한 사람이 되려 노력했지만 나는 나한테 늘 매정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나에게 가장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어린 왕자를 선물했던 그 가수는 이제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그 당시 나의 우상이었던 그 가수가 지금의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청년이었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도 든다. 한 2~3년 정도 지나서 다시 어린 왕자를 읽으면 난 다시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린 왕자는 나를 어떤 세상과 만나게 할까. 사랑하는 나의 어린 왕자. 부디 지금처럼 영원히 순수하고 눈물 많은 아이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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